여론·명분 잃은 공수처, 검찰 잡을 칼은 얻었다

오현석 2020. 12. 11. 00: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공수처법 통과, 이르면 연내 출범
여야 대립 속 취지·방향 변질돼
문 대통령은 "성역없는 수사 숙원"
윤석열 징계위 15일 다시 개최
문 대통령 "늦었지만 약속 지켰다"
전문가 "지지층만 바라본 정치"
"검찰 길들이기로 변질" 지적 나와

야당의 비토권(veto·거부권) 삭제가 핵심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 개정안이 1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민의힘은 전날 김기현 의원이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나섰으나, 이날 0시 정기국회 회기 종료로 3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공수처법 개정안은 이날 오후 다시 열린 임시국회 본회의 첫 안건으로 상정돼 표결에 부쳐졌다. 찬성 187명, 반대 99명, 기권 1명으로 이변은 없었다.

공수처법 개정안은 국무회의 심의→대통령 재가→개정안 공포를 거쳐 즉시 시행된다. 야당의 비토권이 사라진 만큼 여권의 뜻에 맞는 인사가 초대 공수처장 후보로 추천될 전망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2명 가운데 1명을 지명한 뒤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하면, 공수처는 이달 말이나 내년 1월 초 공식 출범하게 된다.

문 대통령은 이날 “공수처가 신속하게 출범할 길이 열려 다행”이라며 “늦었지만 약속을 지키게 돼 감회가 깊다”고 말했다고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문 대통령은 “공수처 설치는 권력형 비리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 사정·권력기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부패 없는 사회로 가기 위한 오랜 숙원이자 국민과의 약속”이라며 “야당이 적극적이고 여당이 소극적이어야 하는데, 논의가 이상하게 흘러왔다. 기약 없이 공수처 출범이 미뤄져 안타까웠다”고 했다. 이어 “나머지 절차를 신속하고 차질 없이 진행해 2021년 새해 벽두에는 공수처가 정식으로 출범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평가와는 달리 공수처법 처리 과정이 여야 대립으로 얼룩지고, 추진 과정에서 취지와 방향이 변질되면서 국민들 사이의 극한 분열만 불렀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권력형 비리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라는 문 대통령의 평가와는 정반대로 야권에선 “권력자들이 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괴물 조직이 탄생하게 됐다”(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명백한 ‘문재인 처벌 방지법’”(오세훈 전 서울시장)이라고 주장한다. 월성 원전 등 권력에 대한 ‘윤석열 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공수처를 여당이 더 밀어붙였다는 게 야당의 시각이다. 공교롭게도 공수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날 법무부는 검사징계위원회를 열어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를 논의했다. 징계위는 15일 다시 열린다.

문 대통령의 숙원 ‘검찰개혁’…중립성보다 권한 축소 택했다

정치권엔 “공수처 출범으로 검찰개혁을 위한 제도적 정비가 완성된다면 윤 총장 징계로 인적 청산이 마무리될 것”이란 인식이 퍼져 있다. 검찰 안팎에선 징계에 더해 윤 총장이 공수처의 1호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검찰개혁’은 문 대통령 입장에선 해묵은 숙제다. 원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슈였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뒤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검경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며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과 대통령비서실장으로서 검찰개혁을 주도했다.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뒤엔 상주(喪主) 역할도 맡았다. 검찰 수사 도중 일어난 비극적 죽음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 사건에서 검찰은 최소한의 윤리도 지키지 않았다”며 “본질적으로 노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정치권력과 검찰의 복수극이었다”(『검찰을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이후 끊임없이 검찰개혁을 강조해 왔다. 2011년 쓴 『문재인의 운명』에선 “검찰개혁은 시대적 과제”라고 했고 “민정수석 두 번 하면서 끝내 못한 일, 그래서 아쉬움으로 남는 일”로 공수처 설치 불발을 꼽았다.

검찰개혁이란 화두는 문재인 정부 초반엔 국가 권력기관 개혁 차원의 문제였다. 100대 국정과제에도 ‘검찰개혁’이 아닌 ‘권력기관 개혁’으로 명시됐다. 검찰이 독점하는 수사·기소권을 분리하면서 경찰·국정원 등과의 협력과 견제라는 제도적 틀에서의 논의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윤 총장에 임명장을 주면서 “살아 있는 권력에도 똑같은 자세가 돼야 한다. 청와대든, 정부든, 집권여당이든 권력형 비리가 있다면 엄정한 자세로 임해 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윤석열 검찰’의 칼이 정권을 겨냥하면서 진정성이 의심받게 됐다. 지난해 ‘조국 사태’로 문 대통령 지지자들은 서초동 앞에 촛불을 들고 모여 “윤석열 사퇴”를 외쳤고, 여당은 검찰을 매일 성토했다. 야당에선 “‘권력기관 개혁’이 ‘검찰과의 전쟁’으로 변질된 순간”이란 주장이 나온다.

올 1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취임하고, 민주당이 지난 4월 총선에서 180석 가까운 의석을 확보하면서 검찰에 대한 압박은 더욱 강화됐다.

검찰개혁 이슈가 가라앉을 때마다 라임자산운용의 전주(錢主)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 등의 제보자들에 의해 검찰의 비리 의혹이 폭로됐다. 이런 일들은 추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 등 검찰개혁의 명분으로 활용됐다.

특히 ‘추미애-윤석열 갈등’이 가팔라지면서 ‘검찰 중립성’ 대신 ‘검찰 권한 축소’에 검찰개혁의 무게가 실렸다. 민주당 지도부에선 “선출된 권력이 국민의 위임을 받아 임명직 공직을 통제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일반 원칙”(김태년 원내대표)이란 말이 나왔다.

야당이 공수처장 비토권을 잃으면서, 주요 수사 대상인 판검사들에겐 저승사자가 될 수 있는 공수처장을 대통령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임명할 수 있게 됐다는 폐해도 지적된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11월 30일~지난 2일 조사한 결과, 검찰개혁에 대해 ‘검찰 길들이기로 변질되는 등 당초 취지와 달라진 것 같다’는 의견이 55%에 달했다(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과정은 포기하고 결과만 가져온 개혁, 지지층만 바라보는 정치”(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란 전문가들의 평가도 나온다. 야당과 검찰을 적으로 간주해 힘으로 이뤄낸 검찰개혁이란 뜻이다.

오현석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