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22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 출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22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 출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생전에 “대권은 절반은 (자신이) 만들고, 절반은 만들어지는 것이다”고 한 말은 잘 알려져 있다. 대선 도전자의 강력한 권력의지와 함께 그를 주자로 만들어주는 정치적인 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말을 ‘절반은 자신의 역량이고 나머지는 외부적 환경에 달렸다’고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된다. 그를 주자로 만들어주는 정치적인 환경 조성도 그 자신에 달렸다는 게 김 전 대통령의 뜻이다.

결국 대권을 성취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대선 도전자의 강력한 의지와 능력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양복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개똥밭에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구를 각오가 돼 있지 않으면 정치할 생각을 하지 마라”고 한 말 속에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지난해 말 윤석열 검찰총장의 대선 주자론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정치권은 긴가민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올해 초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취임한 이후 윤 총장과 본격 각을 세우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윤석열 대망론이 나오기 시작했고, 지난 22일 윤 총장의 국정감사 ‘작심 발언’은 그의 대망론에 본격 불을 지핀 신호탄이 된 양상이다. 여권이 ‘영웅’으로 모셔온 윤 총장이 야권의 ‘대망론’이 되어가는 것은 아이러니다.

윤 총장이 세간의 이목을 받은 것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이다. 당시 그는 ‘2012년 대선 국가정보원 댓글 조작 의혹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맡아 국정원 직원을 체포하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추가 기소했다. 그는 그해 서울중앙지검 국정감사에 참석, 댓글 수사 과정에서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과 조영곤 지검장 등의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해 파문이 일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정갑윤 의원의 “조직을 사랑하는가, 사람에 충성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사람에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라고 말해 화제를 낳았다. 그는 수사에서 배제되고 대전 고검 검사로 좌천됐다.

그런 그가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2016년 말 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 특검 수사팀장을 맡으면서다. 박 전 대통령을 탄핵으로 이끄는데 일조한 것이다. 여권으로선 일등 공신인 셈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탁됐고, 적폐청산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그는 야당의 집중 공세를 받았다. 2017년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이 적폐 청산 수사가 정치 보복이라는 공격에 그는 “검찰(검사)은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고 범죄를 수사하는 사람”이라고 맞받았다.

지난해 7월 검찰총장에 발탁된 그는 인사청문회에서 윤우진 전 용산 세무서장에게 변호사를 소개했다는 의혹에 대해 야당의 집중 공세를 받았고, 여당은 그를 방어하는데 주력했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권에 따라 유불리를 안가리고 소신껏 수사해 온 것이 총장으로 지명된 가장 큰 동력”이라고 했고, 같은 당 김종민 의원은 “‘법에 어긋난 것을 어떻게 수용하나’라는 답변이 인상적이었다”고 치켜세웠다.

검찰총장 임명 직후에만 해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태,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사건 등 여권에 유리한 수사를 맡았던 검사들이 요직에 기용된 반면 환경부 블랙리스트, 손혜원 전 민주당 의원 부동산 투기 의혹 사건 등 여권에 불리한 수사를 담당한 검사들은 한직으로 밀려나면서 여권의 응원을 받았다.

그러나 ‘조국 수사’이후 상황은 반전됐다. 지난해 9월 조 전 장관이 법무부 장관에 부임한 직후 검찰은 조 전 장관 일가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여권은 윤 총장에게 발등이 찍혔다면서 공세로 전환했다. 여권에 대한 윤 총장의 반응도 달라졌다. 그가 지난해 10월 17일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조국 수사를 비판하는 여당을 향해 “이런 종류의 사건은 제 승인과 결심 없이는 할 수 없다”고 응수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여당 의원이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 중 검찰 중립성을 보장해 준 정부를 골라달라”고 한데 대해 “이명박 정부 때 대통령 측근과 형(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을 구속할 때 별 관여가 없었다”며 “상당히 쿨하게 처리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라는 답을 기대했던 여당으로선 의외의 반응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검찰이 지난해 12월 31일 조 전 장관을 뇌물수수·위계공무집행방해·사문서위조·증거위조교사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면서 여권과 윤 총장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듬해 1월 3일 취임한 추 장관은 윤 총장 견제에 본격 나섰다. 두 사람은 울산시장 하명 의혹 수사 사건을 비롯해 사사건건 부딪혔다. 헌정사에서 2005년 딱 한 번 발동한 수사지휘권을 추 장관은 최근 넉 달간 세 번(한명숙 전 총리 사건, 채널A 사건, 라임 사건 등) 행사했다. 여당은 노골적으로 윤 총장 사퇴를 주장하기도 했다.

윤 총장은 지난 국감 발언 이후 의도였던, 아니든 대선판 한복판에 들어선 모양새다. 그는 국감에서 “우리 사회와 국민들을 위해서 어떻게 봉사할지, 그런 방법들은 천천히 퇴임하고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봉사) 방법에 정치도 들어가느냐”는 질문에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했다. 그가 지난해 청문회 때 “정무 감각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한 발언과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대선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의 ‘퇴임 후 봉사’발언은 정치권을 들쑤시고 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하는 위험한 인식”이라고 비판했다. 김두관 민주당 의원은 “검찰을 정치적 욕망을 위한 사유물로 전락시키고 있다”며 사퇴를 주장했다.

국민의힘의 반응은 두 갈래다. 그를 영입해 국민의힘 대권 후보로 키워야 한다는 반응과 아직은 두고보자는 기류도 있다. 장제원 의원은 “여왕벌이 나타났다”고 기대감을 나타냈고, 홍준표 의원(무소속)은 “여의도 판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대단한 정치력”이라며 “잘 모실 테니 정치판으로 오라”고 했다.

사퇴 시점이 언제냐도 관심이다. 윤 총장은 국감에서 임기 완수를 강조했다. 여권으로서는 고민이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윤 총장을 그냥 두자니 문재인 정부 임기말 검찰 칼 끝이 춤을 추지 않을까 걱정되고, 그렇다고 사퇴 압박을 하자니 그의 몸값만 높여줘 ‘죽 써서 개주는 꼴’이 된다”고 했다. 때리면 때릴수록 윤 총장의 대선 등판 구실을 만들어 주는데 대한 우려다. 여권이 키운 ‘윤석열 대망론’에 스스로 발목이 잡혔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이 때문에 여권은 중도 사퇴는 섣불리 거론하지 않되, 추 장관이 지시한 감찰 결과 윤 총장의 약점이 잡히면 그걸 명분삼아 내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어쨋든 국감 이후 윤 총장이 대선판에 진입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은 만들어지는 양상이다. 벌써부터 국민의힘 입당, 제 3지대 도모 등 여러 시나리오가 나온다. 대망론이 힘을 받으면 세력들은 붙게 마련이다. 문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적했듯, 윤 총장의 권력 의지다. 정치 평론가인 서성교 건국대 초빙교수는 “윤 총장이 국민의힘 지지층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문재인 정권과 맞서 있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검찰총장 직을 내려놓고 거품이 빠지면 대선 주자로 성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야권 킹 메이커로 나선 김무성 전 의원은 “윤석열이라는 영웅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에 있다”면서도 이런 조건을 달았다. “윤 총장이 굴하면 그대로 끝난다. 윤 총장이 대선에 마음이 있다면 변해야 한다. 법과 정치는 다르다. 법이 해결하지 못하는 분야를 해결하는 게 정치다. 정치적 소양을 쌓아야 한다.”

대선 주자로 입지를 다지려면 권력 수사를 둘러싼 문재인 정권과의 싸움 수준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한 비전을 갖고 여권과 맞 붙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윤 총장을 위해 몸을 던질 조직과 충성심을 만들어 낼 힘, 리더십을 증명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그러지 못하면 이전의 또 다른 반기문, 고건 사례를 만들어 낼 뿐이라는 것이다.

홍영식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