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의 입] 집권 대통령의 두려움, '광화문 재인산성'

김광일 논설위원 2020. 10. 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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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섯 장 회화 작품을 연달아 보여드린다. 그리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이다. 1970년대까지 유럽을 대표했던 초현실주의 화가다. 뭔가 불가사의하고, 음울하고,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계속된다.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 그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렇다.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 그림은 뜨거운 한낮 이탈리아 광장을 그려냈는데, 텅 비어 있어 버려진 광장을 보여준다. 주변 건축물은 화려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의미하는데, 정작 광장을 을씨년스럽게 버려져 있다.

개천절인 지난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데 키리코의 암울한 그림을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그로테스크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날 경찰은 정부 규탄 시위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거대한 성벽을 세웠다. 경찰 버스 300여대를 이어 붙였다. 총연장 4km가 넘는다. 도로와 인도를 완벽하게 갈라놓았다. 주변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현대해상 빌딩, kt본사 건물, 교보생명 빌딩, 미국 대사관, 정부종합청사, 이런 건물들이 한국의 르네상스를 상징한다면,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광화문광장은 정말 기괴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를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과거 청와대 근무했던 사람들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광화문에 모인 반정부 시위대가 대형 확성기로 연설을 하고, 수십 만 군중이 함성을 지르면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청와대에서 또렷이 들린다고 한다. 대통령이 가장 신경 쓰는 게 바로 광화문 집회다. 대통령이 정치적 궁지에 몰려 있을수록 광화문 집회가 가장 두렵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밤에 악몽을 꾼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추석 연휴 사이에 끼어 있는 개천절 집회에 그토록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원천 차단에 나섰을까. 광화문 일대 지하철역을 모두 무정차 통과시키면서 사람 그림자가 없게 했을까. 왜 마치 무슨 계엄령이라도 내려진 듯 서울 시내 진입로 90곳에 검문소를 설치했을까. 1만 명이 넘는 경찰을 골목마다 배치시켜서 불과 100미터 전진하는데 신분증 검사를 여섯 번이나 받게 했을까. 왜 그랬을까. 지난번 8월15일 ‘광복절 집회’ 때는 특정 종교와 특정 교회를 타겟 삼아 코로나 확산의 책임을 온통 그쪽으로 몰아붙이면서 정치적 이득을 톡톡히 봤는데, 왜 이번에는 원천 봉쇄, 원천 차단에 나섰을까.

그렇다. 문재인 정부는 1년 전 개천절 집회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잊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끔찍한 악몽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상은 ‘조국 사태’의 정점을 달리고 있던 작년 10월3일 개천절 광화문 집회 모습이다. 그날 광화문 집회에는 경복궁에서 숭례문까지, 그리고 종로에서 신문로까지 일부 추산으로 무려 “320만”이라는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최대 인파가 몰렸었다. 우리 취재팀도 그날 광장에 나갔었는데, 광장과 거리에서는 인파에 떠밀려 온몸이 공중에 둥둥 떠다녔고, 제대로 촬영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였고, 고함을 질러도 옆 사람과 대화가 안 될 정도로 함성이 거대했으며, 인근 빌딩에 있는 모든 카페에도 사람이 꽉 들어차 있었다. 아마 그날 문재인 정부는 정권이 무너지는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아마 그 ‘악몽’을 잊지 못하는 청와대와 집권 여당이 이번에는 경찰 간부들이 목을 걸고 개천절 집회를 차단해야 할 만큼 강력한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어떤 시민들께서는 “80년대 독재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 말씀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문재인 정부에게는 1년 전 개천절 집회의 기억이 더 절실한 ‘임박한 위험’으로 닥쳤을 것이다. 작년에는 모든 것이 ‘조국 사태’로 수렴되면서 조국 한 사람만 퇴진시키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았지만 올해는 그보다 몇 배 더 큰 국민의 분노가 폭발 직전까지 농축돼 있다. 부동산 정책의 총체적인 실패로 서민과 3040세대주들의 절망과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던 차에,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 사태, 해수부 공무원 총격 피살 사건이 연달아 겹쳤다. 국민들은 그렇지 않아도 도저히 집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추석 연휴였던 참이다. 이것을 눈치 챈 문재인 정부는 광화문 광장이 무너지면 정권이 위태롭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지금 모든 국민이 코로나 확산 방지에 온 힘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방역 당국의 설명도 옳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문재인 정부 전체 차원으로 확대해서 본다면 국민들로 하여금 부아가 치밀게 만들고 있다. 국민들에겐 추석 때 조상님 성묘도 가지 말고 이동을 자제하라 하더니 정작 강경화 외교장관의 남편은 수억 원짜리 요트를 사러 해외여행을 나가 있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국내에 들어온 어린 유학생들은 미국 학교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아직도 인터넷 강의로 대체하고 있는 실정인데, 외무장관 남편은 그 미국으로 호화쇼핑 여행을 나간다.

청와대에서 몇 발작 안 떨어진 광화문 광장은 유럽의 초현실주의 그림을 떠올릴 만큼 개미 한 마리 안 보일 정도로 ‘재인산성’으로 막았는데, 청와대에서 자동차로 1시간쯤 걸리는 경기도 과천의 서울대공원은 몰려든 인파로 극심한 차량 정체까지 벌어졌다. 이곳은 연휴 기간 내내 하루 2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북적거렸다. 롯데월드, 서울시내 백화점, 식당들도 발 디딜 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민들에게는 추석날 조상 성묘도 못하게 막고 무슨 인터넷 화상 서비스로 대신하라더니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조상님도 아닌데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 묘소에 직접 가서 추석 성묘를 했다.

문재인 정부에게 묻는다. 당신들이 파악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서울대공원에도 없고, 백화점에도 없고, 봉하마을에도 없고, 오로지 서울 광화문 광장에만 있었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경찰에 신고하고 법원이 허락한 집회들은 소규모 차량 시위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마저 그렇게 무서웠단 말인가.

오늘 아침 조선일보 고정 칼럼 ‘만물상’에는 “태극기 소지죄”라는 글이 실렸다. 개천절 날 정부 규탄 시위를 단속하던 경찰이 차량 검문을 하다가 “차 안에 왜 태극기가 있느냐”면서 운전자를 막아 세우기도 했다는 것이다. 정말 어이가 없다. 일제 강점기 말고, 1945년 해방된 이후 대한민국 땅에서 이런 시절은 없었다. 아, 있었다. 6·25 전쟁 때 북한 인민군대가 서울을 점령하고 있었던 석 달 동안이 그랬다. 아무리 ‘개천절 광화문 집회’가 무섭고 두려워도 이건 아닌 것 같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블랙 코미디가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게 묻는다. 다가오는 10월9일 한글날 집회 때, 또다시 ‘재인산성’을 쌓을 것인가. 정말 그런가. 그 산성마저 무너지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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